1JUN

처음 반려견을 맞이하다.

는 20대가 되어서야 반려견이 생겼다.

처음 반려견을 집에 들이고 나서 설렘으로 가득 차 주위 사람들에게 아직 몽실몽실 동그란 털뭉치 같던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내 주위의 대부분은 이미 강아지를 키워본 경험이 있거나 그 강아지의 노견 모습까지 관찰한 경험이 있었다. 생기발랄하게 꼬리치며 주인을 반기는 반려견의 모습 보다는 늙고 병들어 풀 죽은 모습이 더 최근의 기억인 그들에게, 나는 늦깍이 '개엄마'였다.


릴 때 내 단짝친구네 집에는 깨비라는 하이브리드견(속칭 믹스견)이 있었다. 깨비에 대한 단편적 기억은 두 가지다. 개똥, 그리고 발정. 한 시라도 빨리 나가서 놀고 싶었던 내 친구가 개똥이 든 말린 신문지를 들고 바삐 일어서자 신문지 사이로 도르륵 개똥이 떨어져 거실 바닥을 뒹군 일, 발정이 난 어린 강아지가 내 다리에다 '붕가붕가'를 한 충격적인 경험. 일찍이 경험한 원초적(?) 기억 때문인지 나는 강아지를 기르자고 부모님께 졸라본 적이 없었다. 차치하고서도, 나는 어린 나이에도 우리집이 개를 기를만한 충분한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집은 항상 비어있었고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개를 들인다는 것은 외로이 누군가를 기다릴 어린 생명을 하나 더 늘린다는 것 밖에는 되지 않았다. 나는 기다림과 고독에 노출된 유년기를 보냈고,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경험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반려견을 들인다는 것은 한동안 내 생활의 어떠한 옵션에도 속하지 못했다.


든 가족 구성원이 본인 명의 계좌를 사용하며 서로 견고한 사생활이 만들어질 때 쯤,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정이 '돌아오는 곳'이 아닌 '머무는 곳'으로 자리매김할 때, 우리는 모두의 동의 하에 반려견을 맞이했다.


9월 15일, 여름에 태어난 하얀 말티즈 '꼼지'락이 우리 집 장판을 밟는 역사의 순간이었다.



려견을 들이는 것과 그의 윤택한 삶을 위한 용품들을 구입하는 것은 사실 별개의 문제다. 생각하는 것 이상의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하고, 또 많은 공부가 요구된다. 그러나 꼼지의 역사적 이삿날, 영민하지 못한 주인들 덕분에 꼼지의 짐은 이사올 때 돌돌 말려져 있던 알록날록한 담요 한 장이 전부였다. 내 손은 바빠졌고 머리는 복잡해졌다. 제일 먼저 사료와 밥그릇, 물통, 반달 모양 얼굴 빗과 발톱깎이를 장만하고 나서는 아무데나 볼일을 보거나 현관에서 흙먼지 가득한 신발을 뜯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사고, 배변패드 밑으로 소변이 새지 않도록 배변판과 대중교통 등을 탈 때 이용할 이동가방, 각종 물티슈 등을 샀다. 거실 한 켠에는 오직 꼼지만을 위한 전용 서랍장이 생겼지만 그 걸로도 부족해 몇 가지 용품들은 서랍 바깥에 나와 있다.

자는 애견용품들이 주인의 욕심이거나 개들의 삶에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본디 자연에서의 삶을 영위하던 개들이 인간의 주거지로 환경이 변화하면서, 자연적으로 해소되었던 많은 것들이 인위적인 손길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집요한 케어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려견의 가족들이 몇 가지 용품들을 조금 더 구비할 정도의 신경만 써도 많은 부분이 달라질 수 있다.




지는 이제 곧 한 살 생일을 앞두고 있고, 사람 나이로 치면 14살 청소년이 되었다. 간식을 눈 앞에 흔들면 시키지 않아도 털썩 '앉아'를 시연하고, 늑대의 본능을 버리지 못해 파바바박 패트 위를 파다가도 "꼼지야~"하고 부르면 고개를 번쩍 드는, 그러나 절대 쪼르륵 먼저 달려오지는 않는 밀당을 아는 강아지지만 산책 만큼이나 무릎 위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살가운 강아지로 성장하고 있다. 나 또한 꼼지의 서랍 안을 가득 채운 간식에 내 마음이 든든하고, 까득거리며 사료 씹는 소리가 '노래처럼 들리는' 꼼지 엄마로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다. 까만 콩 같은 눈을 마주보고 있노라면 언어의 장벽을 넘어 종의 갭(gap)까지 극복하는 사랑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다만은, 대화가 통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노력하면 그 마음을 읽을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자신에 관한 일이라도 꼼지는 스스로 결정을 할 수가 없다. 안고 있으면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지는 생명이지만, 그를 위한 결정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그럼에도 그 결정으로 파생되는 결과물을 떠안는 것은 온전히 꼼지의 몫이다. 그러나 내가 어떤 결정을 할 지라도, 꼼지는 나를 여전히 사랑해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작년 가을에 대한 회고록이자,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다.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영원히 꼼지의 가족이 되어줄 것이다.


20대 늦은 나이에 반려견을 들였을 때, 일부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강아지가 커서 노견이 되었을 때 내 나이가 30-40대일 것이라고. 그 말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강아지들은 노견이 되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덧없이 흘러가는 지를 내가 이미 경험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개의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흐른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 꼼지는 (사람나이로 따지면) 우리 엄마 보다도 더 고령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가족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이 시간들을 헛되게 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 '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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