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에게 옷을 입히는 건 학대행위인가요?

물 학대에 관한 기사는 잊혀질만 하면 다시 상위에 랭크되면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곤 한다. 요즘 화두로 떠오른 것은 '애니멀 호딩(animal hoarding)'이다. 애니멀 호딩이란 키울 능력이 되지 않는 양육자가 무리하게 많은 반려동물을 사육하거나 또는 반려동물 양육에 필요한 지식들을 겸비하지 못하여 부적절한 환경에서 반려동물을 양육, 방치, 유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애니멀 호딩의 시작은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과 그들로 인해 얻게 된 심적 안정감으로 출발하는데, 사랑해줄 수는 있으나 책임지기에는 부족한 이들의 배드엔딩이 바로 무분별한 번식 행위로 인한 개체 수 증가, 깨끗한 사료와 물 제공 등 기초적인 환경 조성의 부재, 오물과 피부병의 방치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반려동물도 하나의 생명이므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니멀 호딩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베스트 댓글에 떡하니 올라온 한 네티즌의 의견이었다. 애니멀 호딩의 비슷한 양상을 매체 등에서 접한 적은 있어도 이를 용어로 설명한 기사는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미있는 기사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베스트 댓글란은 애니멀 호딩이 아닌 '자신들이 생각하는 동물 학대의 모습'에 대한 네티즌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그 중에 참으로 인상 깊었던 것이 바로 "강아지들에게 옷 입히지 마라, 개들에게는 고문이다."라는 글이었다.



댓글을 읽는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자신의 반려견에게 옷을 입히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댓글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이 어떠한 관점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일 수도 있다. 개를 키우기 전만 해도, 나는 이와 비슷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개는 개 다워야 한다."


것은 비단 개를 키워보지 못한 사람 뿐만 아니라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일 것이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5. 다섯 명 중에 한 명은 개를 키운다는 사회이고, 이미 반려동물 관련 산업의 시장 규모는 2조 원에 육박한다. 이에 따라 반려동물을 위한 각종 상품들도 쏟아져 나오는데, (반려견 카테고리에서는) 애견 신발과 옷을 비롯하여 애견 유모차, 애견 가방, 애견 계단, 애견 침대 등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개에게는 과분한' 혹은 '불필요한' 상품들도 눈에 띠는 것이 사실이다. 늑대의 습성을 잊지 않은 몸이 장판 위를 파바박 긁어대고, 코를 바닥에 박은 채 찹찹 사료를 먹으며, 낯선 이가 오면 맹렬하게 짖어대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인간의 시각에서 설계된 듯한 사치품들을 매치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러나 이제 반려견과 함께 생활한 지 1년 남짓된 초보 견주의 입장에서, 나는 과감하게 나의 낡은 사고를 벗어버렸다. 가까이에서 생활하며 지켜 본 반려견의 생활은, 그리고 그로 인해 변화한 내 생활 또한 이제 저 낡은 명제로는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사회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개성을 무시한 채 한 집단, 집합으로 가두어둘 수 없듯이 동물들 또한 각 개체마다 특성이 다르다는 점이다. 개들 또한 마찬가지다. 견종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고, 그 견종 안에서도 각 개체마다 성격과 습성이 제각각이다. 이전의 한국사회에서 주로 양육된 견종은 실외견, 단모종, 방범용이라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에 반해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이 양육하는 견종들은 주로 실내견, 장모종, 반려의 목적 강화 등의 특성을 지닌다. 단순해보이지만 이로 인하여 견종 간 생활양식은 크게 달라진다. 더불어 같은 견종이라도 그 세부적인 성격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사람들은 반려의 목적이 강화된 실내견의 경우 대부분 친화적인 성격을 가졌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같은 실내견일 지라도 치와와, 포메라니안 등은 주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경우가 많다.

로 인하여 "강아지들에게 옷을 입히지 마라!"라는 말에 의문이 생긴다. 어떤 강아지를 말하는 것일까?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하는 강아지가 있는 한편 옷을 입혀놓으면 '얼음'이 되버리는 강아지도 있다. 그렇다면 불편해하는 강아지에게 억지로 옷을 입히지 말라는 뜻인가? 단모종의 경우 의외로 털이 많이 빠지기는 하나 특별히 미용이 필요 없다. 그러나 장모종의 경우 미용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여야 하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털이 엉키거나 기온으로 인해 미용을 하는 경우에는 옷을 입혀야 할 필요가 있다. 비단 미용 뿐 아니라 피부 질환으로 인하여 치료를 위해 전신의 털을 밀었을 경우, 단모종과 장모종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옷으로 체온을 유지시켜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이유를 모두 배제하고 나서 남는 견종들에 한해서 옷을 입히지 말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런 예외적인 경우가 과연 흔할까?



↓ 출신지역 별 견종 분류 보기 (내용 많음)


티즈, 시츄, 푸들, 진돗개 등의 몇 가지 견종을 제외하고는 그 외 견종들이 모두 똥개(소위 믹스견)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는 복잡하고 다양화된 견종 지도가 답답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매체를 통해 여러 번 얼굴을 내비친 적 있는 골든 리트리버를 포함하여 리트리버 종만 해도 여러 가지로 세분화된다고 하면,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고개를 돌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반려견을 키운 적도 없고 키우지도 않을 것이며, 내 주위에서 반려견을 키우던 말던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관련되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못 박아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쳐도 상관 없다. 그러나 이 복잡하고 세분화된 견종 지도와 순종의 이름을 달고 맥을 유지하는 것들이, 모두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반려견에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어야 한다. 때로는 사치스럽고 과분하게 여겨질만한 반려인(반려동물을 양육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자연의 삶을 살던 동물을 인간의 삶에 편입시키고 또 그들을 목적에 따라 오랜 세월 '개종'해 온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발생된 문제들을 줄이거나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는 다 자라도 3kg이 되지 않는, 소위 스탠다드 말티즈와 함께하는 견주다. 아래의 언급되는 내용은 반려견 '꼼지'가 우리 가족에게 오기 전에 발생된 또는 탄생과 함께 잠재적인 위험을 가지고 성장하게끔 만들어진 것들에 대한 내용이다.


- 지는 모체에게 유전적 피부병의 일종인 모낭충을 물려받았다. 모낭충은 모든 동물이라면 인간을 포함하고 모낭에 서식하는 것이지만, 유전적 요인이나 면역력 저하 등으로 인하여 모낭충의 개체 수가 늘어나 탈모나 염증 등 각종 피부질환을 일으킨다.

- 지는 아랫니가 윗니보다 앞에 위치하는 일명 '언더'라는 부정교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머즐'이라고 부르는 주둥이 길이가 짧은 개체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인해 계획적 번식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탄생한 머즐이 짧은 강아지들에게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질환의 일종이다. 본래 말티즈는 퍼그나 페키니즈처럼 머즐이 짧은 견종이 아니다.

- 지의 양 쪽 귀의 길이는 조금 다르다. 한 쪽은 일반 말티즈처럼 뾰족하지만 한 쪽 귀는 둥글다. 그래서 귀털이 짧을 때 꼼지의 귀는 긴 쪽은 아래로 쳐지고, 다른 쪽은 조금 위로 서 있다. 원인은 알지 못한다.

- 지는 말티즈다. 말티즈는 심장, 혈관 질환의 위험군에 속하며 동시에 뒷다리의 골절을 의미하는 '쓸개골 탈구'로 인한 관절 이상이 생기기 쉽다. 관절이 약하기 때문에 조금만 비만 체형이 되어도 체중 감량이 장려된다.


에 나열한 것들은 모두 선천적인 것이다. (분양 이전 단계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줄이기 위한 노력 또한 여러 방면으로 고려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상상해보라. 만일 나에게도 탄생과 동시에 이러한 질병 또는 잠재적 발병 위험이 함께한다면? 나는 내 건강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최선의, 합리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반려견을 위한 노력은 폄하받기 쉽다. 생명의 경중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동물들의 생명은 너무도 가볍게 여겨지고, 자신을 위해 소리높여 항변하지 못하는 동물들의 존재감은 쉽게 무시된다.



는 지상파의 한 프로그램에 나온 아이돌스타가 '왜 그렇게 동물들을 챙기느냐'라는 질문에 "동물은 아파도 병원에 스스로 갈 수 없다."라고 대답한 것이 핵심적이라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자신의 의사를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인간들이 행하는, 때로는 과분한 것처럼 보이는 처사가 학대행위가 된다는 주장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방치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한 영역으로 동물들의 삶을 편입시키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놓은 만큼, 그에 따른 책임도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살피지 못하는 동물들을 위해 더욱 더 세심하고 주의깊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허락없이 삶의 경계를 무너뜨린 인간들이 '공존'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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