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의뢰인(2011) - 웰메이드 법정드라마를 만들고 싶었으나..
하정우, 박희순, 장혁. 포스터를 가득 메운 배우들의 얼굴만 봐도 믿음이 가는 영화다. 실제로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대부분도 선택 이유로 배우를 꼽았을 것이다. 이름 난 감독도 아니고, 영화관에서 보기 담백하고 깔끔한 내용도 아니다. 단지 검증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 고심 좀 한 듯한 배우들의 카리스마가 빛날 뿐이다. 흔한 법정 드라마 포스터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까만 바탕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법원 마크와 커다랗게 둥둥 떠다니는 얼굴들) 영화 포스터를 비롯하여, 의뢰인은 전체적으로 '뽀대 나게' 잘 닦이고 만들어진 법정 수사극이다. "한국에서 처음 시도되는 정통 법정 수사극이노라."하고 당당하게, 포부 넘치게 말하는 감독이 아예 작정하고 만든 듯 하다. 대사도 깔쌈하고, 캐릭터 하나하나에도 힘이 실렸다. 법정 드라마를 살리기 위해서는 있어야 할 법한 캐릭터들이 다 나온다. 정의감에 불타는 검사, 쇼맨십에 빛나는 변호사, 둘 사이 대립각을 빛나게 해줄 명망 높은 스승(이자 검사 아버지), 자존심에 눈 먼 비리 검사, 변호사의 수족이 되는 수사관과 브로커, 게다가 사이코 패스까지! 거기에 어찌나 공을 들였는 지 장면 하나하나 뽀대가 난다. 거기에 감독의 창작욕을 뒤받쳐줄 배우들 연기력까지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욕심이 과했던 걸까. 하나의 구성진 이야기가 아니라 여기저기 법정 드라마에서 한 컷 씩 빌려와 짜맞춘 느낌이 난다.
눈, 코, 입 따로따로 예쁘다고 미인일까요? 이목구비가 잘 어울려야 미인이죠.
감독은 의뢰인이 '법정 수사극'이라고 했지만, 드라마와 캐릭터의 비중이 강해진 영화는 도리어 법정 부분에서는 긴장감을 발휘하지 못한다. 검사와 변호사 간의 신경전이 벌어지지만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수준이고, 처음부터 경황 증거에만 의존하는 법정 싸움이라는 설정으로 인해, 다양한 증거들의 등장과 변수들을 통한 재판 과정의 긴장감이 줄 재미들이 애초에 잘려나가 버렸다. 그 대신 수많은 경황 증거만을 뒷받침할 증인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확신 없는 재판 진행으로 인해 관객들에게 혼란만 가중 시킨다는 느낌도 적잖이 준다. 더불어 다양한 복선과 이야기의 실마리를 쥔 인물들의 등장은 임팩트 있게 이야기를 휘어 잡는다기 보다는 잔 가지를 치듯 엮여있어 웰메이드 법정 드라마의 정석인 '통쾌함'과 '반전의 매력'을 반감시킨 것도 사실이다.
캐릭터의 매력은 제대로 살렸지만 영화의 매력을 폭발시키는 데에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장혁의 역할도 아쉽다. 군 제대 이후 선택한 작품마다 연기력을 인정 받으면서 역시나 이 영화에서도 호연을 펼쳤던 장혁에게는 서운한 얘기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장혁의 외모적인 면이 연기보다 더 강력했다고 느껴진다. 원래 사이코패스란 표정보다는 외모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홀쭉하게 패인 두 뺨과 서늘한 눈빛은 그 역할에 딱 맞아 떨어졌다.
하지만 꼭 사이코패스여야 했을까? 한때 우리나라에 '사이코패스 열풍'이 분 적이 있다. 기분 좋은 현상은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여차하면 마녀 사냥이라도 하듯 네티즌들이 달려들어 한 사람에게 '사이코패스' 딱지를 붙이곤 하였다. 그 때 영화계도 흐름을 잘 타 톡톡히 재미를 보았는데, '추격자(2008)', '트럭(2007)' 등이 개봉을 하였고 특히 추격자에서 호연을 펼친 하정우는 '국민 살인마'라는 웃지 못할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 때 하정우는 지금은 오히려 사이코패스를 변호하는 역할을 맡았으니 배우란 참 재미있는 직업이다.) 당시 등골이 서늘해지는 연기를 펼친 배우들에게 큰 감화를 받긴 했지만, 그 거품이 다 빠진 지금에 굳이 사이코패스 캐릭터를 버리지 못한 감독이 안타깝다. 오히려 영화 중반 감정을 터트린 장혁의 연기가 빛났으니 차라리 어설픈 살인마였더라면 극적 재미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사이코패스라는 무거운 캐릭터를 극 중간에 떡하니 넣으니, 이야기며 주변 캐릭터가 그 기운에 휩쓸려 죽어버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영화이긴 했지만 괜찮은 수준에 머문다. 훈녀를 보느라 절세미녀를 눈 앞에서 놓친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웰메이드를 만드려던 욕심, 표절 의혹을 만들다.
영화의 후반부를 멋지게 장식한 하정우의 임팩트 있는 최후변론이 넷상에서는 표절 의혹을 받고 있다. (너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생략.) 한 관객은 영화를 보고나서 유일하게 '멋지다'고 느낀 장면이었다며 실망을 표현하기도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뽀대나게' 만드려는 게 눈에 보인 이 영화에서 그 장면 하나만 멋있었다니! 어지간히 눈이 높은 사람인 모양이다.) 실망감을 못 이겨 배신감에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흔한 설정을 비슷한 장르인 드라마에서 돌려 막기하는 것이야 하루이틀 있었던 일이 아니다. 다만 색깔 없는 영화이기에 문제가 됐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 잔 가지 치듯 이야기가 얽히고 설킨 이 영화는 뚜렷한 색깔이나 '몸통'이 없다. 그것이 여주 김하늘 연기 역사상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라 찬사 받는 '블라인드(2011)'와 대비되는 점이다. '블라인드' 또한 "영화 역사상 최초로 시각 장애인이 보는 세상을 구현하겠다"며 포부 있게 영화판에 나온 스릴러 극이다. 잡히지 않는 범인(이 동네도 역시나 사이코패스다.)과 그의 그림자를 쫓다가 결국에는 범인의 속에 숨겨져 있던 괴물과 마주하게 된다는 이야기 설정도 흡사하다. 과잉 수사로 검사직을 사퇴하고 변호사 일을 하게 된 남자와 원치않던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어 경찰의 꿈을 버려야 했던 여자라는 진부하고도 처량한 캐릭터들이 각자의 정의에 대항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뽀대 있게 만들어진 하정우의 캐릭터는 정의감 넘치는 검사하고는 대립하다가, 사이코패스 앞에서는 울고 웃고, 끝에는 정의를 실현하고는 근사한 모습으로 담배를 핀다.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김하늘이 마지막에 범인에게 맞서면서 결국 동생을 지켜냈다는 자신감과 자신의 정의를 얻게 되는, 그런 연결성과 지속성(꾸준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캐릭터와 스토리, 장면에 대한 욕심은 오히려 탄탄한 구성을 방해했고, 영화를 선택하는 이유가 되었던 배우들 또한 영화 속에서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한다. 웰메이드 법정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더라면 캐릭터와 스토리, 즉 법정 밖의 이야기에 힘을 쏟을 것이 아니라 법정 내에서 담아낼 수 있는 컨텐츠에 더욱 몰입했어야 했다. 영화 속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법정에서는 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너무 많았고, 재판 상의 흐름에 관심이 집중될라치면 언제나 그 중심이 바깥으로 튀어버리는 식이었다. 감독의 열정과 배우들의 힘, 근사한 세트와 장소 설정력. 아쉽다. 너무도 아쉬운 영화였다.
의뢰인(2011) - 감독의 차기작에 기대를 걸게 되는 아쉬운 법정 심리수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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